천 년의 종이 위에 그려내는 생명의 기운
나오아키 사카모토
'오늘 여러분이 이 전시회를 보고 나서 제 이름이나 얼굴은 다 잊어도 괜찮지만, ‘음양지’라는 이름만은 꼭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사동 쌈지길에 위치한 작은 갤러리는 그의 이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반백의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 좋은 웃음의 이 일본인 예술가는 그렇게 자신의 명성을 스스로 가장 바닥에 두고 그 위로 ‘음양지’라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감이 안타까운 그 한국의 전통 종이를 기꺼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 놓았다. 우리의 것임에도 한 외국인의 말로 가치를 새로 깨닫는 부끄러움과, 그럼에도 저 세계적인 한지 공예가가 극찬해 마지않는 것이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자부심이 함께 뒤섞이는 순간이다.
나오아키 사카모토. 미국, 덴마크, 뉴질랜드 등 세계 각지에서 종이로 만든 작품전으로 초대받고 있는 그는 현재 일본에서 종이 공예 제품을 제작하는 ‘나오페이퍼’의 대표이자 세계적인 페이퍼 아티스트다. 6월, 서울의 쌈지길 갤러리 ‘숨’에서 열린 나오아키 사카모토의 초대기획전 ‘한 장의 종이를 통해 생겨난 우정’은 특히 한국의 음양지를 이용한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한겴?우정의 해에 활발한 문화교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오픈 시간을 맞은 갤러리는 사방이 유리로 되어 바깥의 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 벽마다 걸려 있는 나오아키 사카모토의 작품들은 부드러운 황톳빛 음양지에 그려진 먹의 힘찬 붓자국으로 빛 사이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관람하러 온 사람들의 한국말과 일본말이 섞이며 낯선 사람들간의 친밀감이 피어날 무렵, 한복을 차려 입은 판소리꾼들이 흥겹게 펼쳐내는 <흥보가>가 전시의 시작을 알린다. 묘하다. 일본인의 전시회에 판소리라. 그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대금의 떨림 소리와 제 그림의 선이 함께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판소리의 노랫가락이 흥겹다가 갑자기 호통치기도 하고 또 가볍게 멈추기도 하는 것이 제가 한지 위에서 붓을 놀릴 때와 너무 흡사하게 느껴졌거든요. 제가 담아내고자 하는 생명, 그 힘의 흐름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아요.”
처음 한국의 음양지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한국에 대해 애정을 가졌던 그는, 그렇게 판소리의 가락마저도 자신의 그림과 혼연일체라 느끼며 눈을 감고 감상하고 있었다.
나오아키 사카모토가 처음 음양지를 만난 것은 1982년, 교토에서 열린 종이에 관한 국제 세미나에서였다. 음양지는 앞뒤로 뒤집어가며 뜬 두 장의 종이를 합쳐 만든 한지로, 수백 년이 지나도 변색되거나 파손되지 않을 만큼 질기며, 신라시대 인쇄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음양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음양지는 그렇게 정교한 제작 방법에서부터 고급스러운 질감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에 3년 뒤, 그로 하여금 직접 한국을 찾도록 만든다.
당시 그는 한지 공방을 운영하던 김영연 씨와 손잡고 음양지를 이용한 사업을 시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영연 씨는 얼마 후 유명을 달리하고, 낙심한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10여 년 동안 음양지를 기억에서 묻은 채 지낸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의 한 잡지사에서 그에게 한국 한지 공예가의 취재를 부탁하게 된다. 10년 만에 이뤄진 두 번째 방문. 기억 속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았던 음양지의 장인을 찾아보지만 이미 맥이 끊겼음을 발견한 그는 결국 그동안 그저 손 놓고 있었던 자신을 자책하기에 이른다.
“그 때는, 그 장인이 돌아가셨으니까, 라고 스스로를 변명했고 사실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핑계 삼아 10년 동안 음양지를 내버려 두었다는 게, 그래서 그 훌륭한 종이가 사라져 버렸다는 게 너무 후회가 되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운명이었을까. 한국을 떠나기 바로 전날 밤, 마지막으로 남은 음양지 장인이 있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간 가평에서 그는 전통 한지장이자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6호인 장용훈 선생을 만난다. 찾아간 집 한쪽 구석에 자리한 음양지 제작 도구들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울먹거렸다는 그. 반가움과 감사함에 장용훈 선생님 앞에서 넙죽 큰절을 올렸죠, 라며 회상하는 그의 눈가에 그 날의 감격이 여전히 오롯하다.
그렇게 시작된 장지방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 나오아키 사카모토의 많은 작업들이 장용훈 선생의 음양지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수십 번의 손길이 더해져야 완성되는 음양지에 혼을 실어 그려 낸 작품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며, 넘치는 생명력으로 전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갤러리 오픈 후 삼청동의 한옥 ‘효재’로 자리를 옮겨 음양지 공예 시연회가 열렸다. 한지를 이용하여 집 안 구석구석을 장식할 소품들을 만들어 보이는 자리.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준비해 왔을, 눈 앞에서 펼쳐질 예술적인 손놀림을 향한 기대가 사람들의 눈에 가득하다. 그런데 그, 편안히 자리를 잡고 빛가리개를 만들어 걸 창문을 살펴보더니 툭, 이렇게 말한다.
“자, 그럼 어떤 모양으로 할까요? 생각을 해 봅시다.”
취재 온 기자들을 의식해서라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디자인을 한치의 오차 없는 진행으로 선보일 것이라는 기대가 어이없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제 지금부터 생각을? “저는 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순간에 더욱 마음에 와닿는 것으로 정하죠. 특히 종이 공예는 가장 자연적인 소재로 만드는 공예니까 더욱 자연스럽게. 자, 이 부분을 동그랗게 할까요, 각지게 할까요? 어떤 게 더 나을 것 같나요?”
그는 정말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가며, 턱에 손을 대고 잠시 생각을 하고 색을 바꿔가기도 하며 말 그대로 평소 작업하는 모든 과정을 ‘시연’하였다. 형식과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 모습. 빈틈없는 공연을 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켜 함께 만들고자 하는 모습이 시연 내내 이어졌다.
“ 시연 보고 나서 무슨 생각했어요?” “ 네? 아, 저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걖?” “ 바로 그거예요. 제가 시연하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정확히 그거예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옛날 것이니까 재미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도 한 번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 그게 시연회뿐만 아니라 제 모든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는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종이 만드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그렇게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전시회마다 가능한 꼭 시연을 가져 사람들의 손에 직접 한지를 쥐어주고, 만져보게 한다. 종이가 가진 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그. 그에게 ‘종이’는 그 존재 자체로서 예술의 구현이자 목표다.
“아마존처럼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오지를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 곳을 다니면서 숲과 강을 보면 그리고 싶은 문양들이 마구 떠올라요.”
종이, 염색, 이 모든 것이 자연으로부터 얻어낸 것이므로 그 속에 어우러지는 종이의 마음을 찾아 다닌다는 그는, 그리하여 오스트레일리아, 히말라야, 인도네시아 등지를 다니며 인디언도 만나고 원주민도 만나 그들의 삶 속에 숨어 있는 인류의 오랜 문양들을 발견해냈다. 한국의 토기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고도 강한 영감을 받아 하루종일 그린 적도 있었노라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일까. 유달리 자연에 친밀한 그는 작업실도 깊은 산 속에 마련했다. 인적 드문 곳에서 15년 전부터 함께해 온 작업실은 바람 소리, 물 소리, 동물 소리들로 가득해 언제나 그의 마음을 순수로 환원시킨다. “새벽 네 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요. 그때가 가장 정신이 명료할 때거든요. 그리고 해가 높이 뜨면, 그러니까 정오쯤 되면 그때부터는 그냥 먹고 자고 그래요. 텔레비전도 없으니까 특별히 따로 하는 것도 없어요.” 웃으며 말하는 그는 자신의 시간을 그저 자유롭게 산 속의 시간에 맡기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덧붙인다.
“돈을 생각하면 한지 공예를 시작할 수 없었죠. 지금이야 고맙게도 사람들이 알아주니까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이것으로 먹고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어요. 그래도 전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어요. 물론 살아가는 데는 돈도 중요하죠. 음양지의 맥이 끊긴 것도 그것이 경제적인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아서니까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음양지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게 제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음양지로 이야기가 돌아온다. 어쩔 수 없나 보다. 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운 것은 종이, 종이, 그리고 또 종이다. 감물을 들인 한지에 일필휘지로 그려낸 그의 그림들은 음양지를 단순한 음양지가 아닌 예술 작품의 경지로 올리는 데 일조하였고, 덴마크, 브라질, 독일 등지에 초청되어 전시회를 가지면서 자연스레 음양지를 향한 세계의 관심도 함께 증가하였다. 늘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그의 작품들은 그래서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자랑스러웠고 또한 당연히, 고마웠다.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좀더 직접적으로 교류를 했으면 좋겠어요. 일본인들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진 한국인들이 많다는 것도 알지만, 모든 일본인들이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한번쯤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나라가 서로를 진실하게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했더라면 상투적이고 판에 박힌 대사로 흘려보냈을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우리 것을 어쩌면 우리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그 가치를 지키려고 애쓰는 마음을 평생동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새벽 네 시. 천지가 빛을 맞을 준비를 하며 고요의 매듭을 푸는 시간, 손끝으로 귀 기울여 종이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다시 붓끝으로 전해 종이 위에 그려낸다. 끊임없이 꿈틀대는 생명의 기운을 천 년의 시간을 담은 종이 위에 뛰놀게 하고 싶은 바람, 그 바람이 가만가만 나의 손끝으로도 전해오는 듯하다.
나오아키 사카모토
'오늘 여러분이 이 전시회를 보고 나서 제 이름이나 얼굴은 다 잊어도 괜찮지만, ‘음양지’라는 이름만은 꼭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사동 쌈지길에 위치한 작은 갤러리는 그의 이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반백의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 좋은 웃음의 이 일본인 예술가는 그렇게 자신의 명성을 스스로 가장 바닥에 두고 그 위로 ‘음양지’라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감이 안타까운 그 한국의 전통 종이를 기꺼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 놓았다. 우리의 것임에도 한 외국인의 말로 가치를 새로 깨닫는 부끄러움과, 그럼에도 저 세계적인 한지 공예가가 극찬해 마지않는 것이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자부심이 함께 뒤섞이는 순간이다.
나오아키 사카모토. 미국, 덴마크, 뉴질랜드 등 세계 각지에서 종이로 만든 작품전으로 초대받고 있는 그는 현재 일본에서 종이 공예 제품을 제작하는 ‘나오페이퍼’의 대표이자 세계적인 페이퍼 아티스트다. 6월, 서울의 쌈지길 갤러리 ‘숨’에서 열린 나오아키 사카모토의 초대기획전 ‘한 장의 종이를 통해 생겨난 우정’은 특히 한국의 음양지를 이용한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한겴?우정의 해에 활발한 문화교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오픈 시간을 맞은 갤러리는 사방이 유리로 되어 바깥의 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 벽마다 걸려 있는 나오아키 사카모토의 작품들은 부드러운 황톳빛 음양지에 그려진 먹의 힘찬 붓자국으로 빛 사이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관람하러 온 사람들의 한국말과 일본말이 섞이며 낯선 사람들간의 친밀감이 피어날 무렵, 한복을 차려 입은 판소리꾼들이 흥겹게 펼쳐내는 <흥보가>가 전시의 시작을 알린다. 묘하다. 일본인의 전시회에 판소리라. 그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대금의 떨림 소리와 제 그림의 선이 함께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판소리의 노랫가락이 흥겹다가 갑자기 호통치기도 하고 또 가볍게 멈추기도 하는 것이 제가 한지 위에서 붓을 놀릴 때와 너무 흡사하게 느껴졌거든요. 제가 담아내고자 하는 생명, 그 힘의 흐름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아요.”
처음 한국의 음양지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한국에 대해 애정을 가졌던 그는, 그렇게 판소리의 가락마저도 자신의 그림과 혼연일체라 느끼며 눈을 감고 감상하고 있었다.
나오아키 사카모토가 처음 음양지를 만난 것은 1982년, 교토에서 열린 종이에 관한 국제 세미나에서였다. 음양지는 앞뒤로 뒤집어가며 뜬 두 장의 종이를 합쳐 만든 한지로, 수백 년이 지나도 변색되거나 파손되지 않을 만큼 질기며, 신라시대 인쇄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음양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음양지는 그렇게 정교한 제작 방법에서부터 고급스러운 질감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에 3년 뒤, 그로 하여금 직접 한국을 찾도록 만든다.
당시 그는 한지 공방을 운영하던 김영연 씨와 손잡고 음양지를 이용한 사업을 시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영연 씨는 얼마 후 유명을 달리하고, 낙심한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10여 년 동안 음양지를 기억에서 묻은 채 지낸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의 한 잡지사에서 그에게 한국 한지 공예가의 취재를 부탁하게 된다. 10년 만에 이뤄진 두 번째 방문. 기억 속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았던 음양지의 장인을 찾아보지만 이미 맥이 끊겼음을 발견한 그는 결국 그동안 그저 손 놓고 있었던 자신을 자책하기에 이른다.
“그 때는, 그 장인이 돌아가셨으니까, 라고 스스로를 변명했고 사실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핑계 삼아 10년 동안 음양지를 내버려 두었다는 게, 그래서 그 훌륭한 종이가 사라져 버렸다는 게 너무 후회가 되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운명이었을까. 한국을 떠나기 바로 전날 밤, 마지막으로 남은 음양지 장인이 있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간 가평에서 그는 전통 한지장이자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6호인 장용훈 선생을 만난다. 찾아간 집 한쪽 구석에 자리한 음양지 제작 도구들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울먹거렸다는 그. 반가움과 감사함에 장용훈 선생님 앞에서 넙죽 큰절을 올렸죠, 라며 회상하는 그의 눈가에 그 날의 감격이 여전히 오롯하다.
그렇게 시작된 장지방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 나오아키 사카모토의 많은 작업들이 장용훈 선생의 음양지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수십 번의 손길이 더해져야 완성되는 음양지에 혼을 실어 그려 낸 작품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며, 넘치는 생명력으로 전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갤러리 오픈 후 삼청동의 한옥 ‘효재’로 자리를 옮겨 음양지 공예 시연회가 열렸다. 한지를 이용하여 집 안 구석구석을 장식할 소품들을 만들어 보이는 자리.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준비해 왔을, 눈 앞에서 펼쳐질 예술적인 손놀림을 향한 기대가 사람들의 눈에 가득하다. 그런데 그, 편안히 자리를 잡고 빛가리개를 만들어 걸 창문을 살펴보더니 툭, 이렇게 말한다.
“자, 그럼 어떤 모양으로 할까요? 생각을 해 봅시다.”
취재 온 기자들을 의식해서라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디자인을 한치의 오차 없는 진행으로 선보일 것이라는 기대가 어이없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제 지금부터 생각을? “저는 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순간에 더욱 마음에 와닿는 것으로 정하죠. 특히 종이 공예는 가장 자연적인 소재로 만드는 공예니까 더욱 자연스럽게. 자, 이 부분을 동그랗게 할까요, 각지게 할까요? 어떤 게 더 나을 것 같나요?”
그는 정말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가며, 턱에 손을 대고 잠시 생각을 하고 색을 바꿔가기도 하며 말 그대로 평소 작업하는 모든 과정을 ‘시연’하였다. 형식과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 모습. 빈틈없는 공연을 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켜 함께 만들고자 하는 모습이 시연 내내 이어졌다.
“ 시연 보고 나서 무슨 생각했어요?” “ 네? 아, 저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걖?” “ 바로 그거예요. 제가 시연하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정확히 그거예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옛날 것이니까 재미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도 한 번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 그게 시연회뿐만 아니라 제 모든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는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종이 만드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그렇게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전시회마다 가능한 꼭 시연을 가져 사람들의 손에 직접 한지를 쥐어주고, 만져보게 한다. 종이가 가진 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그. 그에게 ‘종이’는 그 존재 자체로서 예술의 구현이자 목표다.
“아마존처럼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오지를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 곳을 다니면서 숲과 강을 보면 그리고 싶은 문양들이 마구 떠올라요.”
종이, 염색, 이 모든 것이 자연으로부터 얻어낸 것이므로 그 속에 어우러지는 종이의 마음을 찾아 다닌다는 그는, 그리하여 오스트레일리아, 히말라야, 인도네시아 등지를 다니며 인디언도 만나고 원주민도 만나 그들의 삶 속에 숨어 있는 인류의 오랜 문양들을 발견해냈다. 한국의 토기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고도 강한 영감을 받아 하루종일 그린 적도 있었노라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일까. 유달리 자연에 친밀한 그는 작업실도 깊은 산 속에 마련했다. 인적 드문 곳에서 15년 전부터 함께해 온 작업실은 바람 소리, 물 소리, 동물 소리들로 가득해 언제나 그의 마음을 순수로 환원시킨다. “새벽 네 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요. 그때가 가장 정신이 명료할 때거든요. 그리고 해가 높이 뜨면, 그러니까 정오쯤 되면 그때부터는 그냥 먹고 자고 그래요. 텔레비전도 없으니까 특별히 따로 하는 것도 없어요.” 웃으며 말하는 그는 자신의 시간을 그저 자유롭게 산 속의 시간에 맡기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덧붙인다.
“돈을 생각하면 한지 공예를 시작할 수 없었죠. 지금이야 고맙게도 사람들이 알아주니까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이것으로 먹고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어요. 그래도 전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어요. 물론 살아가는 데는 돈도 중요하죠. 음양지의 맥이 끊긴 것도 그것이 경제적인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아서니까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음양지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게 제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음양지로 이야기가 돌아온다. 어쩔 수 없나 보다. 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운 것은 종이, 종이, 그리고 또 종이다. 감물을 들인 한지에 일필휘지로 그려낸 그의 그림들은 음양지를 단순한 음양지가 아닌 예술 작품의 경지로 올리는 데 일조하였고, 덴마크, 브라질, 독일 등지에 초청되어 전시회를 가지면서 자연스레 음양지를 향한 세계의 관심도 함께 증가하였다. 늘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그의 작품들은 그래서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자랑스러웠고 또한 당연히, 고마웠다.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좀더 직접적으로 교류를 했으면 좋겠어요. 일본인들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진 한국인들이 많다는 것도 알지만, 모든 일본인들이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한번쯤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나라가 서로를 진실하게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했더라면 상투적이고 판에 박힌 대사로 흘려보냈을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우리 것을 어쩌면 우리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그 가치를 지키려고 애쓰는 마음을 평생동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새벽 네 시. 천지가 빛을 맞을 준비를 하며 고요의 매듭을 푸는 시간, 손끝으로 귀 기울여 종이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다시 붓끝으로 전해 종이 위에 그려낸다. 끊임없이 꿈틀대는 생명의 기운을 천 년의 시간을 담은 종이 위에 뛰놀게 하고 싶은 바람, 그 바람이 가만가만 나의 손끝으로도 전해오는 듯하다.
아시아나 기내지. 7월호 中.